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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을이 함께 돌보는 법

by jubad 2025. 4. 21.

가족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치매는 한 사람의 질병이지만, 그 여파는 가족 전체, 나아가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면서 일상생활이 어려워질 경우, 가족들은 24시간 간병에 시달리게 되고, 심리적·경제적 소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매를 돌보는 가족들의 70% 이상이 우울감, 무기력, 소외감을 겪고 있으며, 이 중 일부는 생계를 포기하고 간병에 전념해야 하는 상황까지 맞닥뜨립니다. 또한 치매 어르신이 가출, 분실, 혼란 행동 등을 보일 경우, 가족들은 언제든 일이 터질까 늘 긴장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가족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
가족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이러한 현실은 치매를 더 이상 가정 내 문제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치매를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마을 단위의 대응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치매 친화 마을, 말뿐이 아닌 실천의 현장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외에서는 치매 친화 마을이라는 개념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는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이 안전하게,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을 만들자는 운동으로, 지역 내 다양한 기관과 주민들이 치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기반으로 돌봄에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치매 환자와 동반 가족이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상점 직원, 택시 기사, 우체국 직원 등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치매 인식 교육을 제공합니다. 일본의 ‘오렌지 플랜’은 지역 단위에서 치매 노인을 위한 돌봄 네트워크를 구축해 길 잃은 치매 노인을 빠르게 발견하고 보호할 수 있도록 합니다.

국내에서도 몇몇 지자체에서는 유사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부천시는 지역 약국, 마트, 은행 등에 ‘치매안심가게’ 인증을 도입해, 직원들이 치매 환자를 도와줄 수 있도록 교육받고, 긴급 연락망을 갖추고 있습니다.

서울 은평구는 마을버스 기사와 동 주민센터 직원, 청소 노동자까지 대상으로 치매 인식 교육을 실시하여 지역 전반의 돌봄 역량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들은 단순한 서비스 제공이 아닌, 지역 사회가 하나의 안전망으로 기능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 동네도 할 수 있다: 지역이 함께 만드는 작은 변화

 

치매 친화적인 마을을 만들기 위해 꼭 정부나 지자체의 대규모 예산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작은 변화가 모여 강력한 돌봄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주민 교육과 인식 개선

치매에 대한 두려움은 대부분 정보 부족에서 비롯된 편견입니다.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한 간단한 교육 프로그램만으로도, 치매 환자를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이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동네 도서관, 복지관, 아파트 커뮤니티룸에서 정기적인 교육이나 간담회를 열어보세요.

‘눈과 귀’가 되어주는 마을 상점

동네의 편의점, 미용실, 마트, 약국 등 자주 이용하는 시설이 치매에 열린 공간으로 변모하면, 환자나 가족 입장에서 심리적으로 큰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 사장님은 내가 어떤 상황인지 이해해주신다”는 믿음이 쌓이면서 지역 내 비공식적 돌봄 네트워크가 형성됩니다.

서로 연결된 커뮤니티 플랫폼

마을 주민들이 치매 환자에 대한 정보를 안전하게 공유하고 돌봄을 나눌 수 있는 비공식 SNS 채널이나 단톡방, 마을 앱도 큰 도움이 됩니다. 어르신이 외출했을 때 “00 어르신이 OO 방향으로 걸어가셨어요”라는 간단한 메시지만으로도 빠른 보호 조치가 가능합니다.

이처럼 ‘눈치 채는 주민’, ‘도와주는 가게’, ‘함께 걱정하는 이웃’이 모이면,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돌봄 시스템이 됩니다.

 

치매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조건

 

치매를 둘러싼 편견과 두려움을 줄이고, 환자와 가족이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회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인식의 전환

치매는 ‘불쌍하고 무서운 병’이 아닙니다. 누구나 걸릴 수 있고, 조기 발견과 꾸준한 관리로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질환입니다. 이를 위해 지역사회는 치매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공감을 확산시켜야 합니다.

일상 속 포용적 구조

은행, 병원, 시장, 교통시설 등 주요 생활 인프라가 치매 환자에게 낯설고 배제되지 않는 환경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창구에서 대기 시간이 길어도 친절하게 안내해주거나, 인지 기능이 떨어진 고객을 천천히 도와주는 방식입니다.

정책과 민간의 협력

중앙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민간 기업과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더해질 때 효과는 배가됩니다. 예컨대 마트에서 ‘치매 친화 인증 마크’를 부여하거나, 지역 소상공인 중심의 ‘치매 돌봄 가게’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방식이 그것입니다.

 

돌봄은 공동체의 가장 따뜻한 기능입니다

 

치매는 개인의 질병이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절대로 개인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고령화가 가속화되는 지금, 누군가의 부모, 배우자, 친구가 치매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다음은 우리의 차례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부담이 열 명의 관심으로 나뉘고, 한 가정의 고통이 마을의 연대로 치유될 수 있다면, 치매는 더 이상 무섭기만 한 존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치매는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만 온전히 돌볼 수 있다.”
이 말이 단순한 이상이 아닌 당연한 현실이 되는 날을, 우리 마을부터 만들어 나가봅시다.